베어베터,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모델 발표
수도권 기업이 투자하고 지역의 중증장애인을 고용
1호 '브라보비버 대구' 27일 오픈, 장애인공단과 MOU도
향후 10년 내 전국 100호점 설립 목표
중증장애인 고용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전국 단위 모델이 탄생했다.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대표 김정호, 이진희)는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모델을 발표하고, 이를 적용한 첫 번째 회사 '브라보비버 대구'를 지난 27일 정식 오픈했다.
브라보비버 대구는 라인플러스, 매일유업, 카카오엔터프라이즈, 한국투자증권, KCENC, 카페노티드 등 수도권 10개 기업이 지분을 투자해서(자본금 9억원) 만들었다. 베어베터가 사업 운영과 인사 관리를 책임지고, 발달장애인 근로자 54명이 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제과와 드립백 커피 등을 생산해 지분투자 기업 등에 납품한다.
참여 기업은 지분율에 따라 장애인 고용을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A사가 브라보비버 지분의 19%를 보유했다면 장애인 근로자 54명 가운데 10명을 직접고용한게 된다. 특히, 발달장애인 등 중증장애인은 두 배수로 계산하므로 20명을 고용한 셈이다. 단순 계산시 연간 약 3억원 이상 장애인고용부담금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브라보비버에 출자한 기업들 사이에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발달장애인 고용문제 해결에 집중한 베어베터가 '기업들이 직접참여해 장애인 고용의무를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수요 기업들이 모였다. 그 결과, 장애인 고용의무를 지키려고 고민하는 수도권의 기업과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의 중증장애인 모두가 윈윈하는 새로운 모델이 대구에서 시작했다.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는 "베어베터의 기존 고객사를 비롯해 주변에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모델을 소개하자마자 기업들이 대거 신청했다"며 "2호, 3호 사업장은 언제 만드냐는 문의가 계속 들어온다"고 말했다.
브라보비버 대구 사업장에 마련된 직원 휴게실. 현수막에 지분투자 기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운영 부담↓ 고용 효과↑, 장애인 고용 고민하는 기업에 최적의 솔루션
우리나라에서 국가·지방자치단체와 50명 이상 공공기관·민간기업은 장애인을 일정비율 이상 고용해야 한다. 2022년 현재 대통령령으로 정한 의무고용률은 민간기업 3.1%, 정부 및 공공기관 3.4%.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장애인고용부담금(과태료)을 낸다.
2021년 기준 9039개 사업체가 총 7893억원의 고용부담금을 냈을 정도로 고용의무를 제대로 지키는건 쉽지 않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애인, 그중에도 발달장애인과 같은 중증장애인을 직접고용해서 부여할 직무가 마땅치 않고 인사관리도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들의 운영부담을 덜어주려고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제도를 만들었다. 장애인 고용을 목적으로 일정 요건을 갖춘 자회사를 설립하고 장애인을 고용하면 모회사 고용인원으로 인정한다. 신규 장애인 고용인원에 따라 시설투자비용 등으로 최대 10억원까지 지원해준다. 1개 사업주가 50% 초과출자해서 고용인원을 모두 인정받아도 되고, 2개 이상 사업주가 참여해서 지분만큼 고용인원을 나눠가질 수도 있다.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은 2021년 말 기준 전국에 126개가 운영되고 있지만 생각보다는 확산이 더디다. 이 역시 제대로 운영하려면 신경써야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2개 이상 사업주가 참여하는 형태의 경우에는 대기업 계열사들이 일부 시도할 뿐이었다.
베어베터가 전문성을 기반으로 운영을 책임지는 장애인 사업장을 설립해서 신뢰 구조를 만들고 서로 관계 없는 다수 기업들이 지분에 참여하는 모델을 고안한 이유다. 기업들은 지분출자와 매출기여 의무만 다하면, 장애인 고용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이행함과 동시에 품질 좋은 생산품을 보상으로 받는다.
경영의 건전성은 챙겨야 하지만 실제 사업 운영은 신경쓸 일이 거의 없다. 중증장애인 고용에 따른 장애인고용부담금 감소 효과가 워낙 크기 때문에 비용 측면에서도 기업에게 무조건 이익이라는게 베어베터 측의 설명이다.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의 운영구조 / 출처=베어베터
공공-민간-비영리의 삼각 편대로 전국 확산 기대
베어베터는 오는 6월 17일 창립 10주년을 맞이한다. 2012년 5명의 발달장애인 고용으로 시작해 2021년 말 기준 240명이 넘는 발달장애인과 함께 하고 있다.
베어베터와 꾸준히 거래하면 장애인고용부담금을 감면받는 '장애인 연계고용 부담금 감면제도'를 공격적으로 활용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인쇄, 화훼, 제과, 커피 등의 품목으로 약 500개 기업과 거래하고 연간 100억여원의 매출을 올린다.
1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직접고용 확산에도 나섰다. 네이버, NHN, 카카오, 삼정회계법인, 대웅제약과 같은 대기업에 카페, 인쇄소, 편의점 등을 운영하는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설립을 컨설팅하고 현장을 위탁받아 안정적으로 관리한다. 60명이 넘는 직원을 이직시키기도 했다.
베어베터가 이번에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모델을 선보인건 중증장애인 고용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주력해온 장애인 연계고용과 직접고용 컨설팅은 모두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대상인데, 이들은 주로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있다.
실제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조사한 '지역별 발달장애인구 대비 민간고용 비중'을 살펴보면 서울은 발달장애인 100명 중 30명이 일자리가 있지만 그 외 지역은 100명 중 6명만 있다.(2020년 기준) 기존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았던 상황에 베어베터가 '수도권 기업의 지방 고용 투자' 라는 대안을 제시하니 정부도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를 반영하듯, 브라보비버 대구의 오픈식이 열린 27일 현장에서는 우리나라 장애인 고용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베어베터가 MOU를 체결했다. 제목은 '중증장애인 지역 균형 고용 촉진을 위한 업무협약'이다.
이진희 베어베터 대표는 협약식에서 "서울에서 의무고용이 필요한 회사들이 지방에 투자하고, 지방에서는 고용하고 확산하자"고 말했다. 차정훈 공단 고용촉진이사도 "대구를 시작으로 지역에 브라보비버가 계속 설립되기를 기대한다"며 "공단도 교육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공단은 브라보비버 대구 설립 준비단계에서도 예비사원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을 지원한 바 있다.
김정호 대표는 모델의 안정적인 전국 확산을 위해 비영리 재단 '베어베터랩스(가칭)' 설립 계획도 밝혔다. 브라보비버와 같은 사업장이 전국에 설립되도록 업무 및 휴식 공간과 운영시스템을 마련하고 경영자문을 하는게 주요 역할이다.
김 대표가 부동산과 현금 등 개인사재 37억원을 출연한다. 여기에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설립한 브라이언임팩트재단이 100억원을 추가 출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전국적인 인프라 구축에 탄력이 붙을 예정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베어베터가 '중증장애인 지역 균형 고용 촉진을 위한 업무협약 MOU'를 맺었다. 공단의 차정훈 고용촉진이사(왼쪽 세 번째)와 베어베터 이진희 대표(왼쪽 네 번째)가 협약서에 사인을 했다.
10년 내 100호점 설립 목표... 지역 균형 발전에도 기여할 것
베어베터는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모델의 성공을 확신한다. 이 모델이 장애인 고용의무를 지켜야 하는 기업들의 고충을 확실히 해결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장애인의무고용률이 몇 년을 주기로 상향되고 부담금 기준액도 최저임금에 연동돼 올라가는 등 정부의 정책은 계속 강화되고 기업의 수요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베어베터는 향후 10년 내에 브라보비버 사업장을 서울 외의 225개 시군구 중에 100개소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최소 600개 기업이 지분투자에 참여하며, 전체 중증장애인 고용인원은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지역 균형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 자체가 지역 내 생산증대와 고용창출 효과가 있는데다가, 지역 특산물을 수도권의 대기업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보비버 대구는 기존 베어베터 사업영역인 제과와 커피로 시작했지만, 지역에 따라 사과, 배 등 특산물을 세척하고 포장해서 지분참여 기업에 납품하는 등 다양한 활용방안이 나올 계획이다.
이번 사업이 예상대로 성장할 경우 베어베터의 기존 주력사업에 악영향을 준다는건 역설적이다. 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이 올라가서 장애인고용부담금을 덜 내게 되면 베어베터의 물품을 구매해서 얻는 이익(고용부담금 감면)이 줄어들고, 거래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정호 대표는 "베어베터의 설립 목표는 중증장애인 고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사회 전체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베어베터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브라보비버 대구 사원들이 드립백 커피를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