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
‘브라보비버인천’을 가다
브라보비버인천 장애인 사원이 노트 제품에 띠지 포장을 하고 있다. /인천=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인천 부평구에 있는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찾았다. 출입문을 열자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았다.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였다. 간판을 다시 확인했다. ‘브라보비버(Bravo Beaver)인천.’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았다.
브라보비버는 발달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가 고안한 지분투자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다. 지난해 5월 대구점 개소에 이어 9월에는 인천점이 설립됐다. 지난달 26일 기준 브라보비버인천 소속 장애인 사원은 총 57명으로 모두 중증장애인이다.
이날 체육관에 모인 발달장애인 8명은 비장애인 코치 오지현씨와 ‘셔플보드’ 경기 중이었다. 셔플보드는 가늘고 긴 막대(큐)로 원반(디스크)을 코트 내 득점구역에 밀어 넣어 점수를 내는 스포츠다. 행동반경이 크지 않고 경기 방법이 간단해 중증장애인도 쉽게 즐길 수 있다. 경기에 참가한 장애인 사원들은 점수를 낼 때마다 하이파이브하며 서로 격려했다. 오지현 코치는 “사원들은 근무 전이나 후에 ‘비버운동장’에서 태권도, VR스포츠 등 다양한 체육 활동을 한다”며 “장애 유형과 정도를 고려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개인별 맞춤 운동과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비장애인 코치 오지현씨가 장애인 사원들과 셔플보드 경기를 하는 모습. /인천=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집 밖으로 나온 발달장애인
브라보비버인천 소속 장애인 사원들은 하루 4시간씩 근무한다. 중증장애인 근로에 최적화된 시간이다. 주 업무는 노트·볼펜 등 사무용품 포장이다. 단순 반복 작업이라 발달장애인도 쉽게 할 수 있다. 사업장에 항시 대기하는 비장애인 사원은 장애인 사원의 업무를 돕는다.
근무를 마친 장애인 사원은 사업장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비버운동장에서 체육 활동을 즐긴 뒤 퇴근한다.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 사원 만족도가 높다.
“일하니까 기분이 좋아요. 처음에는 집을 나와 사회에서 일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돈도 벌고 저축도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입사 6개월째인 ‘포장 베테랑’ 이상진(20)씨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시중에 판매될 스티커 제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상진씨가 처음부터 밝았던 건 아니다. 입사 초기에는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손이 심하게 떨려 포장 봉투에 제품을 담기 어려웠다. 출퇴근할 때도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고, 동료와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이진수 브라보비버인천 대표는 “6개월 만에 상진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했다. “회사에 나와 일하면서 상진씨는 활기를 찾았어요. 출퇴근할 때도 씩씩하게 걷고, 다른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의사소통합니다. 방금 일하는 거 보셨죠? 손 떨림도 줄었고, 포장 작업도 빠르게 해요. 웃음도 얼마나 늘었는지 몰라요.”
상진씨의 변화는 꾸준한 소통 덕분이다. 브라보비버인천에는 작은 상담실이 있다. 아담한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였다. 장애인 사원이 업무 혹은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장애인 관리자가 해당 사원과 상담을 진행한다. 상담 테이블에는 ‘울어도 돼요’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가 놓여 있다. 이진수 대표는 “발달장애인도 행복하게, 좋은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며 “지속적으로 장애인 사원들과 소통하면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개선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 사원들이 시중에 판매될 스티커 제품을 포장 봉투에 담고 있다. /인천=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장애인 의무고용도 ‘윈윈(win-win)’ 모델로
장애인 표준사업장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일반형 ▲자회사형 ▲컨소시엄형 ▲지분투자형 등이다. 일반형은 장애인을 10인 이상 고용하는 사업장으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은 기업이 장애인 고용을 위해 발행 주식 또는 출자 총액의 50%를 초과 투자해 자회사 형태로 설립한 사업장이다. 민간기업들이 주로 택하는 방식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은 누적 128개소다.
최근에는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설립이 더딘 모양새다. 2019년 전국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은 총 97곳으로 전년(78곳) 대비 24.36% 증가했다. 하지만 증가율은 2020년 15.46%, 2021년 12.50%로 매년 줄다가 지난해에는 1.59%로 급감했다. 이진희 베어베터 공동대표는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대기업들은 이미 표준사업장 설립을 마쳤고, 중소기업은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설립 요건인 ‘최소 고용인원 10명’을 충족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행 등 금융기업은 비금융기업에 15% 이상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출자 총액 50%를 초과 투자해야 하는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을 사실상 설립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증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기관·지자체·공공기관이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설립하는 컨소시엄형 표준사업장은 판로 개척·확보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대기업의 참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에 베어베터는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은 장애인을 직접 고용할 여력이 되지 않는 기업들이 일정 지분을 투자하고, 지분 비율에 따라 장애인 고용을 인정받는 형태다. 일례로 A사가 50인 규모의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 지분의 10%를 보유했다면, 5명을 직접 고용한 셈이다. 다만 ‘중증장애인 더블카운트제도’에 따라 중증장애인 1명은 고용 인원 2명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10명을 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베어베터는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에서 중증장애인만 고용한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브라보비버인천에 지분을 투자한 기업은 KB국민은행, 세아제강, NH투자증권 등 14곳이다. 업종도, 사업체 규모도 다른 기업들이 중증장애인 고용을 목적으로 모였다. 이진수 대표는 “특정 기업집단의 계열사가 아니더라도 공동의 목적을 가진 여러 기업이 각자 투자하는 방식으로 표준사업장을 설립할 수 있다는 소식에 기업들이 몰려들었다”며 “장애인 고용의무를 지키려는 수도권 소재 기업들과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의 중증장애인 모두가 ‘윈윈’하는 구조”라고 했다.
이진희 베어베터 공동대표는 “서울에 거주하는 등록 발달장애인의 약 30%가 일자리를 구했지만, 지방의 경우 그 비율이 6%에 불과하다”며 “베어베터는 브라보비버를 전국적으로 확산해 수도권 기업이 지역의 장애인 고용을 활성화하도록 유도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앞으로 브라보비버가 장애인 표준사업장의 새로운 기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천=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